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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아래에는-더-많은-새로운-것이-있습니다
“태양 아래에 새것은 없다”는 전도서의 명제는 인간 존재의 허무를 강조하는 데 자주 쓰이지만, 이 작품은 그 반대 방향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태양 아래에는 더 많은 새로운 것이 있다’는 선언은 익숙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감춰진 욕망과 비밀을 품고 살아간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이 글은 단순한 소설적 구조를 넘어, 무의식, 억압, 상징, 욕망 등 분석심리학의 요소로 가득 찬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로서의 이야기다. 특히 남편과 아내, 성과 집, 장미와 깃발, 그리고 이름 없는 타인들은 모두 하나의 ‘페르소나’를 상징하거나 그 이면에 숨겨진 ‘그림자’를 드러낸다.
무의식의-정원,-장미는-말을-하고-있었다
작품은 첫 장면부터 상징으로 가득하다. 폭우로 만들어진 도랑, 버려진 포도밭, 창문이 난 별장 등은 모두 무의식의 풍경을 형상화한다. 특히 'Virtus semper diligenda(미덕은 언제나 사랑받아야 한다)'라는 말이 새겨진 사암 기둥은, 폐허와 같은 공간 속에서도 이상적인 가치를 보존하려는 의지의 흔적이자, ‘상징의 수호자’처럼 작용한다. 그러나 이 미덕은 정작 그 공간 안에서는 완전히 무력화되어 있다. 잡초가 무성한 정원과 아무도 찾지 않는 별장은 페르소나가 붕괴된 자아의 공간이다. 여주인공이 남편에게 억눌리고 고립된 일상 속에서 오직 신문만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무의식 속 그림자의 출현을 예고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장미 덤불 아래에 앉아 소외된 욕망과 대면하고 있으며, 그것이 곧 '장미 정원'이라는 비밀의 공간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스웨덴-남작이라는-타자,-욕망의-투사
이야기의 중반부, ‘스웨덴 남작’의 등장은 단순한 인물의 추가가 아니라, 주체가 억눌렀던 욕망의 구체화된 투사로 볼 수 있다. 이름조차 없는 그는 여주인공이 상상 속에서 그려낸 이상화된 타자이며, 그녀의 상상은 실질적인 교류 이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폐허의 성, 외국어, 결투의 전설, 닿을 수 없는 거리, 그리고 장미 덤불을 통한 비밀스러운 소통. 이 모든 요소는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된 욕망의 상징적 표상’이다. 특히 서로 주고받는 신호, 즉 이불과 깃발, 장미와 향기는 언어가 아닌 감각적이고 상징적인 소통을 가능케 한다. 이것은 분석심리학의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여주인공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로 내면의 이상적 남성상(아니무스)을 창조하고, 그 투사 대상인 남작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려 한다.
장미-정원이라는-개인화의-무대
분석심리학에서 ‘개인화(Individuation)’란, 자아가 무의식의 요소들을 통합해 전체적 존재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 이야기에서 장미 정원은 단순한 화훼 공간이 아닌, 여주인공이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하고, 억압된 무의식을 해방시키는 개인화의 무대로 기능한다. 남편의 억압 아래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그녀가, 비밀리에 이불을 만들고, 장미를 키우고, 드레스를 마련하는 일련의 과정은 자기 실현의 과정이다. 그녀가 접붙이기를 통해 야생 장미를 귀한 카잔리크 장미로 바꾸는 행위는, 상처 입고 버려진 자기 자신을 새로운 존재로 재창조하는 상징적 치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화는 항상 위험을 수반한다. 결국 그녀는 디프테리아에 걸려 죽고, 장미는 무덤 아래 심어지는 상징으로 전환된다. 삶과 죽음, 피어남과 시듦의 경계에서, 장미는 여전히 말을 걸고 있지만 그 말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무의식의-죽음과-남은-상징
결국 이야기는 죽음으로 귀결된다. 여주인공의 병과 죽음은 감정의 폭발이 육체에 반영된 결과이며, 동시에 억압된 무의식의 종말이다. 그녀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그녀를 위해 새겨진 오벨리스크의 글귀—Virtus semper diligenda—는 새로운 해석을 갖는다. 이 말은 이제 억압의 명령이 아닌, 그녀의 삶을 기리는 찬사로 읽힌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미덕’을 사랑한 사람이었으며, 그것이 그녀를 감옥 같은 삶에서 탈출시킨 것이기도 하다. 남편은 그 비밀을 끝까지 알지 못하고, 진실은 장미와 함께 무덤 속에 묻힌다. ‘카잔리크 장미’는 현실의 꽃이 아니라, 상징의 세계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이며, 죽음 이후에도 말을 계속하는 존재다. 그녀는 죽었지만, 그 상징은 공동의 무의식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그것이 이 소설이 전하는 가장 깊은 진실이다.